여섯 형제가 함께 떠났습니다. 해방된 조국에 살아 돌아온 건,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1910년 12월, 압록강을 건넌 60여 명
나라가 일본에 넘어간 1910년 겨울, 서울의 이름난 명문가 여섯 형제가 조용히 재산을 처분하기 시작했습니다. 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 명동 일대의 땅과 집을 급히 팔아 마련한 돈은 당시 약 40만 원으로 전해지며, 지금 가치로 수백억 원에 이른다는 추정이 있습니다.
그해 12월 말, 형제의 가족 60여 명은 마차에 나눠 타고 한겨울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향했습니다. 편안한 삶을 버리고 나라를 되찾을 사람을 기르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전 재산으로 세운 신흥무관학교
형제들은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 자리를 잡고, 이상룡·이동녕 등과 함께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열었습니다. 이 학교가 훗날 신흥무관학교로 이어집니다.
문을 닫을 때까지 이곳에서 길러진 독립운동가는 2천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졸업생들은 청산리 전투를 비롯한 무장 독립운동의 중심에 섰습니다.

하나둘 쓰러진 형제들
재산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 자금으로 쏟아부은 끝에 형제들은 가난과 병에 시달렸고, 하나둘 이국땅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첫째 이건영은 중국에서 병으로, 둘째 이석영은 상하이 빈민가에서 굶주림 끝에, 셋째 이철영은 만주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넷째 이회영은 1932년 11월, 다롄으로 향하던 중 일본 경찰에 붙잡혀 뤼순 감옥에서 고문 끝에 순국했습니다. 66세였습니다. 막내 이호영은 1933년 베이징에서 가족과 함께 행방불명됐습니다.
1945년, 홀로 돌아온 다섯째
1945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가운데 여섯 형제 중 살아서 고국 땅을 밟은 사람은 다섯째 이시영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는 임시정부 수립부터 광복까지 법무총장, 재무총장, 국무위원으로 임시정부를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부통령이 되어 다시 세운 학교
1948년 7월, 이시영은 제헌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으로 선출됐습니다. 그리고 형들과 함께 세웠던 학교를 잊지 않았습니다. 1947년, '신흥'이라는 이름을 이은 학교를 다시 열었습니다.

이 학교는 신흥초급대학, 신흥대학을 거쳤습니다. 한국전쟁 중 재정난 끝에 1951년 조영식에게 운영이 넘어갔고, 1960년 이름을 바꿔 오늘의 경희대학교가 됐습니다. 인수 과정을 두고는 이시영의 유족과 학교 측의 입장이 엇갈렸고 소송도 있었지만, 판결로 결론이 나지는 않았습니다.
이시영은 1951년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며 부통령직을 내려놓았고, 1953년 피란지 부산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
넷째 이회영이 순국한 11월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기도 합니다. 이름난 집안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걸었던 여섯 형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으로 불립니다.
그해 겨울 압록강을 건넌 여섯 사람 가운데 다섯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한 번씩 불러 봅니다. 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시영), 서울시 내 손안에 서울(우당 이회영), 국사편찬위원회, 한겨레·시민언론 민들레(신흥대학 인수 관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