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1월 2일, 미국에서 한 장짜리 여권이 발급됩니다. 맨 위에는 '대한민국 림시정부 림시려힝권', 번호는 제105호. 이름 칸에는 호시한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여행 목적을 적는 자리에는 한자 두 글자가 또렷이 쓰여 있습니다. 歸國, 귀국. 광복한 지 넉 달 반이 지난 겨울이었습니다.

이 여권은 2026년 8월 독립기념관이 처음 세상에 공개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광복 뒤에도 여권을 발급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유일한 실물 자료라고 합니다. 주미외교위원장 임병직의 이름으로 나온 이 종이 한 장에는 "통힝의 자유를 이로써 청구함"이라는 옛 맞춤법 문장도 남아 있습니다. 귀국을 꿈꾸던 한 사람의 인생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에 시작됐습니다.
시민권을 받을 수 없던 나라에서
호시한은 1885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1908년에는 샌프란시스코 한인공동회 회원으로 활동했고, 네브래스카주 헤이스팅스에서는 미주 한인들의 항일 투쟁 조직인 한인소년병학교에 몸담았습니다. 1912년, 소년병학교 시절의 그는 군모를 쓰고 제복 깃을 목까지 세운 채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1920년에는 국내로 들어와 임시정부 군자금을 모으다 일제에 체포됐습니다. 그 뒤 상하이를 거쳐 다시 미국으로 갔는데, 이때 그는 한국 이름 대신 중국 이름으로 된 중화민국 호조, 지금으로 치면 여권을 들고 있었습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는 선택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중국 이름 사용에 대한 진술서'는 중국 호조를 쓴 당사자가 일제의 압박을 직접 언급한 최초의 실물 기록으로 꼽힙니다.
미국에서 그는 가진 것을 계속 내놓았습니다. 1930년에는 학생운동을 돕자며 재미 한인들에게 동맹단연회(同盟斷煙會) 참여를 호소했고, 1927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 항일전쟁 동정금, 광복군 후원금, 군사운동금을 여러 차례 냈습니다.

100달러와 함께 보낸 편지
1940년 6월 11일, 그는 LA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손편지를 씁니다. 미국 국방 성금으로 100달러 우편환을 넣었다는 첫 문장 뒤에 이런 고백이 이어집니다. "저는 한국인이고 1904년부터 미국에 살았습니다. 법으로는 시민권을 받을 자격이 없지만, 늘 좋은 '시민'이 되려고 애써 왔습니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100달러는 필요한 금액에 비하면 큰돈이 아니지만 지금 자신이 낼 수 있는 전부라고.
나라를 잃은 사람이, 자기를 시민으로 받아 주지 않는 나라를 위해 쓴 편지입니다. 시민이라는 단어에 따옴표를 친 그 손글씨에서 그가 살아 낸 처지가 고스란히 읽힙니다.

80년 만에 쓰이는 여권
'귀국'이라 적힌 그 여권을 그가 실제로 썼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분명한 건 그가 미국에서 생을 마쳤고 LA 로즈데일 묘지에 묻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잊혔습니다.
그를 다시 불러낸 건 뜻밖에도 그의 무덤이었습니다. 미주중앙일보가 2025년 '독립유공자 묘소 찾기' 보도로 그의 묘를 알렸고, 후손들은 그제야 할아버지가 2021년 애족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합니다.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 후손 찾기'로 후손임을 확인받은 가족은 2025년 12월 훈장을 받았고, 집에 보관해 온 여권과 편지, 사진 같은 사료를 조건 없이 독립기념관에 기증했습니다. 그중 17점이 올해 8월 처음 공개된 것입니다.
그리고 올해 10월 27일, 로즈데일 묘지에서 그의 묘를 여는 작업이 시작됐습니다. 미주중앙일보에 따르면 유해는 11월 15일 인천공항에 도착해 16일 서울 3·1독립선언기념탑에서 봉환식을 치른 뒤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될 예정입니다.
80년 전 그가 받은 여권은 지금 독립기념관에 있습니다. 목적란의 두 글자는 그때와 똑같습니다.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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