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다시 만날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는 거절했습니다. 45년을 기다려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이유는 한 문장이었습니다. "어찌 나만 가족 재회의 기쁨을 맛보겠다고 북행을 신청할 수 있겠소."

장기려 박사
외과의사 장기려

평양의 외과의사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장기려 박사는 평양도립병원장이자 평양의과대학 외과 교수였습니다. 아내 김봉숙 여사와 자녀들이 평양에서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1950년 겨울, 전세가 바뀌며 피란 행렬이 남쪽으로 향할 때 그는 둘째 아들 가용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아내와 다른 자녀들은 북에 남았습니다. 그것이 가족과의 마지막 만남이 됐습니다.

피란지에서 연 무료 병원

부산에 자리 잡은 그는 1951년 영도의 한 교회에서 무료 진료기관으로 복음병원을 열었습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피란민들이 그를 찾았습니다. 그는 1976년까지 25년 동안 이 병원의 원장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뛰어난 외과의사이기도 했습니다. 1959년에는 국내에서 간 대량절제 수술에 성공해 그 결과를 학계에 발표했고, 1961년 대한의학회 학술상을 받았습니다.

의료보험의 씨앗, 청십자

1968년 그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도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효시로 꼽히는 곳으로, 훗날 전 국민 의료보험 제도의 뿌리가 됐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1975년에는 조합이 직접 운영하는 청십자병원도 열었습니다.

1979년 그는 이런 공로로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사회봉사 부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다시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45년을 홀로 살았습니다. 주변에서 재혼을 권할 때마다 그의 대답은 같았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북에 살고 있다."

그의 머리맡에는 늘 아내의 젊은 시절 사진이 놓여 있었습니다.

1985년, 다시 찾아온 기회

1985년 9월, 남북 고향방문단과 예술단이 서울과 평양을 오갔습니다. 분단 이후 처음 성사된 이산가족 방문이었습니다. 이 무렵 정부는 사회·문화계 인사들의 가족 상봉을 주선하며 장기려 박사에게도 기회를 건넸습니다.

그는 거절했습니다. 같은 아픔으로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자신만 먼저 가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이유였습니다. 그는 대신 아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어찌 나만 가족 재회의 기쁨을 맛보겠다고 북행을 신청할 수 있겠소.

끝내 닿지 못한 재회

장기려 박사는 아내를 다시 만나지 못한 채 1995년 크리스마스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누구보다 간절했기에,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이산가족이 그 기다림을 이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