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광주. 시위 진압에 나선 경찰관들에게 전남경찰국장 안병하가 내린 지시는 단순했습니다. 무기를 쓰지 말 것, 과잉진압을 하지 말 것. 경찰청은 그가 남긴 말을 이렇게 전합니다. "시민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

이 한 문장 때문에 그는 자리와 건강, 그리고 남은 삶의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서야 경찰이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이름이 됐습니다.

안병하 치안감
안병하 치안감

전쟁을 겪은 군인, 경찰이 되다

안병하는 6·25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었습니다. 중령으로 예편한 뒤 1963년 총경으로 특별 채용돼 경찰에 들어왔습니다. 전쟁터에서 총이 무엇을 남기는지 직접 본 사람이었습니다.

1980년 5월, 전남경찰국장의 선택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가 커지자 그는 경찰관들에게 무기 사용을 금지하고 과잉진압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시민을 상대해야 할 적이 아니라 지켜야 할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같은 선택을 한 사람이 또 있었습니다. 이준규 목포경찰서장은 경찰서의 총기를 섬으로 옮겼습니다. 경찰청은 그 결과 목포에서는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나오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명령을 따르지 않은 대가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안병하는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강제로 사직해야 했습니다. 이준규 서장도 체포돼 파면됐습니다. 이들과 함께 근무한 전남 경찰관 68명이 징계를 받았고, 123명이 사표를 내야 했습니다.

경찰을 떠난 안병하는 8년 동안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고, 1988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뒤늦게 돌아온 이름

그의 이름이 다시 불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 2002년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됐습니다.
  • 2005년 국립서울현충원 경찰묘역에 안장됐습니다.
  • 2006년 국가유공자로 등록됐습니다.
  • 2015년 국가보훈처가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습니다.
  • 2017년 경찰청이 처음 선정한 '경찰 영웅'이 됐고, 한 계급 특진한 치안감으로 추서됐습니다.

올해 5월, 5·18민주화운동 46주년을 맞아 경찰 지휘부는 국립서울현충원의 안병하 치안감 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안병하·이준규 두 사람의 정신을 이어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경찰의 날에 다시 읽는 이름

10월 21일은 경찰의 날입니다. 경찰이 무엇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지 묻는다면, 안병하라는 이름이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명령과 양심 사이에서 그는 시민을 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