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기업용 서비스 제안서 한 건을 AI와 함께 만들었다. 파일 이름 끝 숫자가 v12까지 올라갔다. 쪽수는 23쪽까지 불었다가 15쪽으로 줄었고, 마지막에 디자인 도구로 옮겨 20쪽으로 마무리했다.
판이 늘어난 원인을 되짚어 보니 AI의 실력이 아니었다. 첫 지시가 문제였다. "설득력 있게 써 줘." 이 한 줄에 AI는 과장을 얹었고, 기능을 늘렸고, 쪽을 더했다. 문장은 매끄러웠다. 매끄러워서 틀린 곳이 잘 보이지 않았다.
민망한 고백이다. 나는 대기업의 제안 평가와 여러 사업의 심사위원으로 여러 해 동안 수백 건의 제안서를 읽고 점수를 매겼다. 떨어지는 제안서가 어떻게 생겼는지 누구보다 많이 봤다. 그런데도 내 제안서가 열두 판을 돌았다. 아는 것과 하는 것 사이에는 늘 순서의 문제가 끼어 있다.
제안서가 멈추는 다섯 자리
심사위원석에 앉아 보면 떨어지는 제안서는 비슷한 자리에서 멈춘다.
- 회사 소개로 시작한다. 첫 장에 연혁과 조직도가 나온다. 고객은 자기 문제가 나오기 전에 읽기를 멈춘다.
- 기능을 모두 넣는다. 고객이 말한 문제와 이어지는 기능은 그중 몇 개뿐이다.
- 근거 없는 말을 쓴다. "최고 수준", "획기적 절감" 같은 말은 고객이 사내 보고에 옮기지 못한다.
- 가격 앞에서 흐려진다. "별도 협의"로 끝나면 고객은 예산을 올릴 숫자가 없다.
- 다음 행동이 없다. 마지막 장이 "감사합니다"다. 고객은 무엇을 하면 되는지 모른다.

다섯 가지의 뿌리는 하나다. 제안서를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담는 문서로 본다. 실제로는 다르다. 제안서를 받은 담당자는 혼자 결정하지 않는다. 그 문서를 들고 팀장에게, 대표에게, 구매 담당에게 간다. 제안서는 우리가 없는 회의실에서 읽히는 문서다. 연혁으로 시작하는 문서를 들고 가서 윗사람을 설득할 담당자는 없다.
첫 번째 착각: 많이 넣을수록 설득력이 생긴다
회신이 없으면 대개 더 넣는다. 레퍼런스를 한 장 더, 기능 비교표를 한 장 더 붙인다. 문서는 두꺼워진다. 고객이 회의실에서 "왜 이 제안을 검토해야 하는지" 한 줄로 말하기는 더 어려워진다.
심사하면서 높은 점수를 준 제안서가 모두 화려하지는 않았다. 세 가지가 뚜렷했다. 첫 쪽에서 고객의 어떤 문제를 푸는지 보였다. "이 문제는 이 방법으로 푼다"가 문제마다 하나씩 짝지어 있었고, 이번 제안이 다루지 않는 범위도 적혀 있었다. 표지부터 마지막 쪽까지 한 회사가 만든 문서로 보였다.
심사위원은 짧은 시간에 여러 건을 나란히 놓고 비교한다. 목적과 해결이 한눈에 짝지어 보이는 제안서가 먼저 남는다. 두꺼움은 그 비교에서 불리하다. 내 판단은 이렇다. 제안서에서 설득력은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에서 나온다.
고객의 말을 세 열로 잇는다
열두 판을 돈 뒤 지시문을 이렇게 바꿨다. 먼저 세 열로 정리한다. 고객이 말한 것, 우리가 줄 것, 그것을 받치는 자료. 어느 열과도 이어지지 않는 기능은 뺀다. 고객이 말하지 않은 것은 주장하지 않고 질문으로 돌린다.
세 열에는 규칙이 있다.
- 왼쪽 열은 고객이 쓴 단어를 그대로 둔다.
- 가운데 열은 왼쪽 열과 이어질 때만 쓴다. 제품이 할 수 있는 일이 스무 가지라도 고객이 말한 것이 세 가지면 가운데 열은 세 줄이다.
- 오른쪽 열이 비면 가운데 열을 약하게 쓴다. 근거 자료가 없는 약속은 "시범 도입에서 확인"으로 돌린다.
책에서는 설비 진동 센서를 파는 가상 회사 M사로 이 표를 보여 준다. 고객사 팀장은 메일에 "돌발 정지 때문에 야간조가 자주 멈춘다"고 썼다. 통화에서는 "점검 기록이 종이에 흩어져 있다"고 했다. 1차 미팅에서 공장장은 "사람을 더 뽑기 어렵다"고 했다.

M사의 제품 소개서에는 기능이 열여섯 개 있었다. 세 열 표에 이어진 기능은 다섯 개였다. 나머지 열한 개는 본문에서 뺐고, 그중 두 개만 부록 한 쪽 "그 밖의 기능"으로 내렸다. 에너지 사용량 분석, 작업자 출퇴근 연동 같은 기능은 아까워도 넣지 않았다. 고객이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서다.

두 번째 착각: 고객의 문장은 다듬어야 한다
카피를 오래 쓴 사람일수록 이 대목에서 손이 근질거린다. "돌발 정지 때문에 야간조가 자주 멈춘다"를 "설비 가동률 저하"로 바꾸고 싶어진다. 보고서 문체로는 그쪽이 깔끔하다.
바꾸지 않는다. 고객은 제안서에서 자기가 한 말을 다시 볼 때 "이 회사가 내 말을 들었다"고 느낀다. 고친 말은 우리 말이다. 고객의 단어가 사라지면 제안서는 누구에게나 보낼 수 있는 문서가 된다. 맞춤법이 조금 틀린 고객의 문장이 우리가 다듬은 문장보다 힘이 세다.
AI와 일할 때 이 규칙은 더 중요하다. AI는 기본적으로 문장을 다듬는다. 고객이 "야간조가 멈춘다"고 했는데 AI가 "야간 생산 차질"로 바꾸면, 제안서에 쓸 가장 좋은 문장을 잃는다. 그래서 고객의 말을 뽑을 때는 이렇게 시킨다.
아래는 고객과 주고받은 기록이다. [메일, 미팅 메모, 통화 메모. 누가 한 말인지 표시]
고객 쪽 사람이 한 말만 뽑는다.
출력: 번호 | 말한 사람(직함) | 원문 그대로 | 어느 기록에서 | 날짜
규칙:
- 문장을 다듬지 않는다. 맞춤법이 틀려도 그대로 옮긴다.
- 우리 쪽 사람이 한 말, 우리 쪽이 요약한 말은 뺀다.
- 같은 뜻의 말이 여러 번 나오면 모두 적고, 몇 번 나왔는지 센다.
- "이거 기존 설비에도 붙나요?" 같은 질문 형태의 말도 빠뜨리지 않는다.
고객이 말하지 않은 문제를 표에 넣고 싶을 때도 있다. 그때는 표 아래 "확인 질문"으로 적는다. "귀사도 인력난을 겪고 계실 것입니다" 같은 문장은 고객이 가장 싫어하는 문장 가운데 하나다. 업계 통념을 고객의 사실처럼 쓰는 순간 담당자는 이 회사가 자기를 조사하지 않았다고 읽는다.
'줄 수 없음'을 적은 제안서가 믿음을 산다
공장장의 "사람을 더 뽑기 어렵다"에 M사는 가운데 열에 "우리가 줄 수 없음"이라고 적었다. 센서가 사람을 대신한다고 쓰고 싶었지만 받치는 자료가 없었다. 제안서에는 이렇게 썼다. "인력 부족을 해결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점검 순서를 이상 징후 우선으로 정할 수 있습니다."
영업 현장에서는 이 문장을 손해로 본다. 나는 반대로 본다. 고객이 한 말을 전부 풀 수 있다는 표는 대개 억지로 이은 표다. 결재 라인의 누군가는 반드시 그 억지를 찾아낸다. 고객이 틀린 주장 하나를 발견하면 나머지 문장까지 의심한다. 못 하는 일을 먼저 밝힌 제안서는 할 수 있다는 문장의 무게가 달라진다. 표를 다 만들고 "우리가 줄 수 없음"이 하나도 없으면 다시 보라고 권한다.
AI에게는 기준부터 준다
"설득력 있게"라는 지시에는 기준이 없다. AI는 기준이 없으면 많이 쓴다. 세 열 표는 AI에게 기준을 준다. 표에 없는 것은 제안서에 쓰지 않는다. 이 한 줄이 생기면 AI가 회사 소개로 시작하거나 그럴듯한 수치를 지어 넣을 틈이 줄어든다.

순서도 중요하다. 내 제안서가 열두 판까지 간 데는 순서가 거꾸로였던 탓이 컸다. 슬라이드를 먼저 만들고 내용을 슬라이드 위에서 고쳤다. 세 열 정리는 판을 여러 번 고친 뒤에야 했다. 다시 한다면 목업을 열기 전에 표부터 만든다. 표가 먼저 서면 디자인 단계의 수정이 크게 줄어든다.
업종이 달라도 틀은 같다. 소프트웨어라면 고객의 불편 문장("엑셀로 매주 합친다")을 기능과 잇고, 가운데 열에 기능 이름 대신 없어지는 작업을 쓴다. 서비스라면 가운데 열에 "누가, 언제, 무엇을 한다"를 쓴다. 유통이라면 납기, 최소 수량, 반품 같은 공급 조건을 쓴다.
이번 주에 해 볼 다섯 가지
- 최근에 보낸 제안서 하나를 열어 첫 쪽을 본다. 회사 소개로 시작하면 고객의 문제를 앞으로 당긴다.
- 그 고객과 주고받은 메일·미팅 메모에서 고객이 한 말만 원문 그대로 뽑는다. 위의 지시문을 그대로 써도 된다.
- 세 열 표를 만들고, 어느 말과도 이어지지 않는 기능을 표 아래 "쓰지 않을 기능"에 적는다.
- 오른쪽 열이 빈 약속은 "시범 도입에서 확인"으로 낮춘다.
- "우리가 줄 수 없음" 칸이 하나도 없으면 표를 다시 본다.
이 표가 해 주지 않는 것
세 열 표를 만든다고 수주가 정해지지는 않는다. 가격, 기존 거래 관계, 고객사 사정은 제안서 밖에 있다. 고객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면 왼쪽 열이 빈다. 그때는 공개 자료로 추정을 적고, 첫 미팅에서 물을 질문으로 바꿔 둔다. 추정을 고객의 말처럼 쓰면 이 표는 오히려 독이 된다.
그래도 하나는 분명하다. 목적과 해결이 흐린 제안서는 비교 단계까지 가기 어렵다. 회신이 없는 제안서에 더 넣을 자료를 찾기 전에, 그 안에 고객의 말이 몇 줄 있는지부터 세어 보길 권한다. 제안서는 결국 고객의 말을 고객에게 되돌려 주는 문서다.
이 글의 바탕이 된 책
이 글은 《고객의 말로 쓰는 제안서》 들어가며와 3장, 실전 사례를 바탕으로 썼다. 책은 0장부터 12장까지 자료 출처대장, 고객 조사, 세 열 연결표, 문제 정의, 한 쪽 요약, 가격과 다음 단계, 검수를 순서대로 따라 하게 짰다. 그대로 복사해 쓰는 AI 지시문 28개와 워크시트 양식, 실제 기업용 제안서를 12판까지 고친 기록을 함께 실었다. 책 속 M사는 가상 사례다. 이 책은 수주를 보장하지 않는다.
제안서 연재 다음 편에서는 세 열 표 다음 단계, 고객 문제를 한 문장으로 좁히는 법을 다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