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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호필의 진짜 주인, 캐나다인 프랭크 스코필드
- URL: https://www.sharehows.com/frank-schofield-seokhopil/
- Published: 2026-10-25T08:24:13.000Z
- Updated: 2026-10-25T08:35:38.000Z
- Description: 미드 주인공의 별명으로 알려진 '석호필'. 이 이름의 진짜 주인은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을 카메라로 기록한 캐나다인 프랭크 스코필드입니다.
- Author: 쉐어하우스
- Tags: 피플·스토리

'석호필'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많은 사람이 미드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 마이클 스코필드를 떠올립니다. 한국 시청자들이 '스코필드'를 소리 나는 대로 옮겨 부른 애칭입니다. 2007년 3월 한국을 찾은 주연 배우는 기자회견에서 이 별명이 한국에서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딴 애칭이라고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역사적 인물이 바로 진짜 석호필, 캐나다인 수의학자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1889\~1970)입니다.

![1958년 한국을 다시 찾은 프랭크 스코필드](https://www.sharehows.com/content/images/2026/10/---------------_b_portrait58.jpg)

1958년, 38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은 스코필드

## 편지 한 통을 받고 온 수의학자

스코필드는 1889년 영국 워릭셔주 럭비에서 태어났습니다. 1907년 홀로 캐나다로 건너가 토론토의 온타리오수의대를 졸업하고 박사 학위를 받았고, 모교에서 세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를 한국으로 이끈 것은 세브란스의학교 교장 에비슨이 보낸 편지 한 통이었습니다. 1916년 11월, 그는 아내와 함께 한국에 들어와 세브란스의학교 교수가 됐습니다. 젊은 시절 앓은 소아마비로 한쪽 팔과 다리가 불편해 늘 지팡이를 짚었지만, 그는 한국행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04년 무렵의 세브란스 병원](https://www.sharehows.com/content/images/2026/10/---------------_b_severance.jpg)

1904년 무렵의 세브란스 병원

## 돌처럼, 호랑이처럼, 남을 도우며

한국에 온 그는 '석호필(石虎弼)'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었습니다. 돌 석(石)에는 굳은 의지를, 범 호(虎)에는 호랑이 같은 기개를, 도울 필(弼)에는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는 뜻을 담았다고 그는 말하곤 했습니다.

![석호필의 진짜 주인, 캐나다인 프랭크 스코필드](https://www.sharehows.com/content/images/2026/10/---------------_b_hanja.jpg)

## 1919년, 카메라를 든 34번째 민족대표

1919년 3·1운동을 앞두고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은 그에게 거사 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이 부탁을 받아들였고, 만세 현장을 사진에 담아 해외에 알렸습니다.

![1919년 해외에 소개된 3·1운동 만세 현장](https://www.sharehows.com/content/images/2026/10/---------------_b_march1.jpg)

1919년 해외에 소개된 3·1운동 만세 현장

그해 4월 경기도 화성 제암리에서 일본군이 마을 사람들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지른 학살이 일어나자, 그는 감시를 피해 현장에 들어가 불탄 마을을 사진으로 남기고 보고서를 썼습니다. 일본의 공식 기록이 '소요 사건'이라 부른 그날의 참상은 그의 기록을 통해 해외에 알려졌습니다. 이런 활동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34번째 민족대표'라고 부릅니다.

![1919년 학살 직후의 제암리](https://www.sharehows.com/content/images/2026/10/---------------_b_jeamni.jpg)

1919년 학살 직후의 제암리

## 감옥의 유관순을 찾아가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유관순 등을 찾아가 만나고 총독부에 수감자들에 대한 처우를 항의했습니다. 일제의 감시와 압박은 점점 심해졌고, 1920년 그는 결국 한국을 떠나 캐나다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옥사 복도 (현재 서대문형무소역사관)](https://www.sharehows.com/content/images/2026/10/---------------_b_prison.jpg)

서대문형무소 옥사 복도 (현재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38년 뒤, 다시 한국으로

캐나다로 돌아간 뒤에도 그는 한국을 잊지 않았습니다. 1958년, 38년 만에 국빈 자격으로 다시 한국을 찾은 그는 서울대 수의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고아와 가난한 학생들을 도왔습니다. 1960년 문화훈장,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습니다.

1970년 4월 12일, 그는 8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남긴 말은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 주오"였습니다. 그는 지금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잠들어 있습니다.

드라마 주인공의 별명으로 먼저 알려졌지만, 석호필은 100여 년 전 이 땅에서 한국인을 위해 카메라를 들었던 한 사람의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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